중용(中庸) 혹은 중화(中和)

내일 비가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 우리는 내일 아침 집을 나갈 때 우산을 가지고 나갈것입니다. 그러나 내일 비에 대한 정보를 알지못하면 사람은 비를 맞지 않기 위해 매일우산을 갖고 다니는 불편함을 겪든가 아니면 우산없이 비를 흠뻑 맞야하게 됩니다. 우산을 쓴다고 하여 비를 완전하게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산이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 우산 모든 것이 삶의 준비를 의미하게 되는데 준비는 나를 이해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하여 개과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운명은 오직 자신만이 자신만의 방법으로만 바꿀 수 있습니다.

만일 운명이 어떤 노력과 의지로 변화되지 않는 고정불변의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사주를 공부해야 할 이유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운명이란 어원을 찾아보면 생명이 움직인다는 것으로 "삶의 변화"를 의미하는데, 그 변화의 중심에는 나와 나의 선택이 있으며 그 선택의 기준점은 나를 잘 아는 것입니다. 사주에서 나를 안다는 것이 중용의 도와 같은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부족함과 지나침을 알고 스스로 개과하여 균현을 맞추는 것인데 이를 중용(中庸) 혹은 중화(中和)라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너무 많이 먹게 되면 해로운 병이 생기기 마련이며 너무 부족하게 먹어도 면역력 저하로 병이 드는 이치와 같습니다. 단지 사람에게 욕망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태과가 더 문제되기 쉬운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욕심이란 것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것을 버릴 수는 없지만 이치에 맞게 조절하고 통제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사주는 우리에게 성인이나 군자가 되란말은 하지 않는데 다만 지나치게 되면 병이 될 수 있으므로 삼가는 것이 좋다고 정보를 전달해 줄 뿐입니다.

이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되는 법을 아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애벌레들은 꼭대기를 향해서 경쟁적으로 죽을힘을 다해서 기어오르게 되는데요. 하지만 그들은 왜 자신이 꼭대기에 오르는지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저 남들이 오르니까 그들보다 더 빠르게 올라가려고 할 분입니다. 결국, 천신만고 끝에 애벌레는 정상에 올라가게 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삶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경재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애벌레처럼 무작정 길을 따라가는 이유는 나 자신과 삶에 대한 질문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으로 인간은 각자 다르기 때문에 길도 각각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인데 우리는 이 것을 다르다고 인지하고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스로가 길을 묻고 길을 나서지 않게 되면 중간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상황이 발생될 것입니다. 모든 시작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자신에게 계속해서 질문은 던져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을 거쳐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서 길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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